"Love story" 란 얼마나 멍청한 소설인지 모른다.
"그녀는 Beatles, Bach, 그리고 나를 사랑했다."
뭐 이런 식으로 시작하던가. 내가
이야기하 려는 그애는 백혈병 환자였다. 창백한
얼굴에 긴 생머리에
쌍가풀진 커다란 눈이 사슴처럼
맑은 청순가련한 소녀도, 슬프디 슬픈
시집을 끼고 사는 문학소녀도,
파리한 핏줄이 내비치는 연약한 손을
가진 소녀도 아니었다. 그냥,
여드름 덕지덕지하고 홑꺼풀 눈,
머스마처럼 짧게 깎은 머리에 치아
교정을 좀 하는게 어떨까 싶은
모습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수줍음타는 평범한 열여섯살 소녀였다.
나는 그애가 Beatles를 좋아하는지,
서태지와 아이들을 좋아하는지
(아차... 이게 아니군. 벌써 3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니 서태지와
아이들이 판치던 때가 아니었었지, 아마?)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애는
살고싶었을 뿐이다. 그저
남들처럼 숨쉬고, 먹고, 뛰어다니고,
기뻐하고, 슬퍼하면서 살아가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전공의로 일하기 시작한지
넉달째, 6월의 일이었다. 정신없이
돌아 가던 생활 속에서 약간은 제 박자를
찾아가고 일도 손에 익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섣부른 자신감과
환자의 생명이 내 손안에
쥐어져있는 듯한 착각으로 약간은
우쭐한 기분이 무럭무럭 피어나기
시작하던 때이다. 전임 주치의로부터
그애를 처음 인계받았을 때
항암화학요법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격리병동에 들어가지 못하고
일반병동에 있으며 그것이 그애의 집안의
경제적인 형편때문이라는
점 외에는 특별히 다른 환자와 다른
것은 없었다. 그저 급성 림프아구성
백혈병 환자일 뿐이었다. 항암제가
투여되기 시작하던 때였고 이제부터
서서히 힘든 고비가 찾아올 터였다.
백혈병의 항암제 치료는 현대의학이
악성종양에 대해 거둔 큰 개가
중의 하나이다. 지금이라면 "Love story" 는
그렇게 끝맺을 수는 결코
없었을 것이고 그 뒤로도 길고 지루한,
결코 로맨틱하지는 않을
투병기가 이어져야만 할 것이다.
이런 치료만큼 죽기살기의 치료법이
또 있을까. 항암제는 그애 의 몸안에서
암세포들도 물론 죽이겠지만
그 애의 골수의 정상적인 세포들도
(몇 남아있지도 않은) 전멸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엔 골수의
기능이 회복되기까지의 백혈구의
감소로 인한 감염에 대한 무방비
상태와 혈소판의 감소로 인한 출혈의
위협에서 그 애를 지키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우주선 발사
전의 카운트다운하듯이 그애의
혈구숫자들은 줄어들어갔다. 그리고
열이 나기 시작했다. 강력한 항생제를
최대량으로 투여하는 것만이
치명적인 패혈증을 막을 방법이다.
당연히 예상하던 바대로 혈소판의
수치는 2만 이하까지 곤두박질쳤다.
혈소판을 수혈해줄 수밖에 없다.
엄청난 소모전을 벌이며 그렇게
그렇게 버텨나가고 있었다.
그애의 어머니가 나를 보자고하였다.
제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보이
는, 가난과 갖은 풍상에 찌든
생활에 지친 모습... 그애의 어머니는
내 앞에 앉아서도 한참을 적절한 말을
꺼내지 못해 머뭇거렸다. 그리곤
울어버릴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더 이상 견딜 방법이 없어요. .."
이 엄청난 소모전을 더
이상 이끌어나갈 경제적인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그애에게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아직은 전혀 판단
할 수가 없었다. 최소한 최초의 항암요법이
성공했는지 즉, 일단 그
애의 골수에서 암세포들이 사라졌는지를
안 후에야 앞으로의 치료계획
이 수립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이야기했고, 그애의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일어났다.
"벌써... 빚이 산더미여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병실에 들어가보니 그애는 울고 있었다.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
지를 짐작하고 있는 것일까?
"왜 우니?"
"...."
"응? 왜 우냐고...?"
"저기... 머리요..."
이런... 그애는 머리카락이 빠졌다고 울고 있었다.
항암제라고 다
머리카락 빠지는 건 아니지만 워낙에 약을
뒤집어쓰다시피 했으니...
그애의 베겟머리에는 빠진 머리카락이
흉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녀의
험난한 운명에 비하면 설사 대머리가
된다해도 그건 별일도 아니다.
하지만 열여섯살 소녀에겐 세상 어떤
일보다도 더 슬픈 일이었으리라.
나는 참으로 누굴 위로하는덴 소질이
없지만 내가 아니면 누가 위로해
주랴.
"야, 임마...뭐 그걸 가지고 질질
짜고 그래. 치료 다 받고나면
틀림없이 다시 난다구. 다시 안 나면
내 머리 삭발해서 가발 만들어
줄께."
그녀는 울다말고 피식거리고 웃었다.
실은 나는 머리 숱이 참 적은
편이다. 이마도 넓고...
"정말이죠? 약속하는 거죠?"
그래...내가 네 머리카락 하나 책임 못지겠니...
그런 약속이라면
얼마든지 하마... 우리는 새끼손가락까지 걸었다.
에구, 유치해라...
무슨 삼류 멜로 영화보는거 같네...
그리고,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서 골수의
기능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되고 치료의 결과를 판정해야 할 시기가 왔다.
나는 그애의 골반뼈에서
뜯어낸 몇 조각의 골수를 임상병리과로 보냈고,
이젠 기다리는 일 밖엔
할 일이 없었다. 며칠 뒤, 나는 그 애의
이름이 적힌 결과지를 받아
들었다. 섯다꾼이 패를 쪼듯이 결과지를
슬그머니 들췄다. 거기에는
그녀의 운명을 결정짓는 단어들이 적혀있었다.
"Acute lymphoblastic leukemia, L1, in persistence."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해석할 수가
없을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별로 해석하고 싶지가 않았다. 치료는 실패였고,
가증스런 암세포들은
아직도 그 애의 골수 속에
우글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애에게 혹시나 도움을 줄 수 있을까하고
병원 사회사업가의 도움을
받아 신문과 방송에 연락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매스컴이 뭘 한단 말인가.
그것들은 센세이션을 먹고 사는 흉물들이
아니던가. 이 소녀의 이야기란
그 엄청나게 탐욕스런 밥통 속 어디
쯤으로 사라졌는지 자취도 찾을 수
없으리라. 그 애의 어머니는 한층 더
초췌해진 모습으로 다시 나를 찾아
왔다. 나는 결과에 대해 설명하고
취할 수 있는 길은 다시 항암요법을
반복하는 것이며, 성공할 확률은
한충 떨어진다는 것을 설명해주었다.
한참을 망연자실하고 있던 그애의
어머니는 마침내 피를 토하는 듯이
말을 이었다. "읒.. 그만 데리고 갈랍니다." 나는
이번엔 전혀 할 말이 없었다.
다음 날, 그애는 퇴원했다. 그애의 어머니의
부탁에 따라 나는 그 애에게
치료는 아주 성공적이라고 새빨간 거짓말을 해주었다.
통할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애는 과연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을까? 그 애는 흉하게
빠진 머리를 푹 뒤집어 쓴 모자로 감추고
나에게 다가와 뭔가를 내밀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거 넥타이 핀인데요..."
나는 억지로 웃어보였다. 그리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애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참고 있음에 분명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우중충한
병실의 복도를 걸어갔다. 그것이 내가 본
그 애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애가 준 넥타이 핀은 한 번도 쓰지 않은
채 지금도 서랍 속에 쳐박혀
있다. 나는 넥타이 핀은 원래 잘 쓰지 않는 편이니까...